일제강점기 시절의 간도특설대 복무 전력으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비판을 받음과 동시에 6.25 전쟁 중 다부동 전투 승리와 평양 선두 입성 등 불후의 성과를 남긴 명장이라는 찬사를 받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명과 암을 동시에 보여주는 인물이다.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평양에서 지냈다. 7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가정환경을 딛으며 약송소학교를 나온 이후 평양사범학교에 진학했다.
1939년 3월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교직에 종사했지만 군인의 꿈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1941년 12월 만주국 봉천의 봉천군관학교에 진학하여 제9기로 졸업한 뒤 자무쓰 부대에 배속되었다. 1943년에는 간도특설대로 전근, 3년 동안 이 부대에 배치되어 활약했다. 만주군 간도특설대는 1938년부터 당시 만주 지역에서 활약하던 사회주의 계열의 김일성, 강건, 김광협, 최용건 등이 가담한 동북항일연군 및 팔로군 소속 게릴라 부대를 주로 상대하며 여러 차례의 잔혹한 토벌작전을 벌여 악명이 자자했다. 이 때문에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이 있는 백선엽도 기계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백선엽이 배치되기 한참 전인 1940년에 이미 김일성 및 만주빨치산파 독립운동가들은 토벌을 견디다 못해 동북항일연군을 빠져나와 소련 연해주로 망명하여 소련군에 배속되었으므로, 실제 독립운동가들을 맞상대할 일은 없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이러한 백선엽의 간도특설대 경력을 아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으나, 본인이 이를 구체적으로 시인한 것은 1983년에 일본에서 출간된 『対ゲリラ戦―アメリカはなぜ負けたか (대게릴라전 ― 미국은 왜 졌는가?)』(하라쇼보(原書房) 출간)에서였다. 이 책은 제목이 말해주듯이 게릴라 토벌 전술에 대한 책으로서, 백선엽은 광복 이전의 간도특설대 복무 경험과 6.25 전쟁 당시의 지리산빨치산 토벌을 수행한 백(白)야전사령부를 이끈 경험을 중심으로 설명하였다. 이 책 초반부의 한 장(章)인 「間島特設隊の秘密(간도특설대의 비밀)」 본문에서 백선엽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주의주장이야 어찌되었건 간에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간도특설대에서는 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기분을 가지고 토벌에 임하였다."
이후 출간된 한국어 자서전인 『군과 나』(1990년), 『실록 지리산』(1992년) 등에서도 간략하게나마 간도특설대 경력을 언급했다. 2005~2009년 활동한 대한민국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일본에서 2000년 출간된 백선엽의 회고록 『若き将軍の朝鮮戦争(젊은 장군의 한국전쟁)』(소시샤(草思社) 출간)에 나온 간도특설대 활동 내역을 토대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였다.
"(전략) 봉천의 군관학교를 졸업한 것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때였다. 나는 견습사관으로서 동부 만주의 寶淸(파오칭)에 주둔하고 있던 만주국군 보병 제28단(=연대)에서 근무하였다. (중략) 이어서 佳木斯(자무스)의 신병훈련소의 소대장으로 전임되었는데 (중략) 1943년 2월, 나는 만주 동부의 한반도에 접하는 간도성에 있던 간도특설대에 전임되었다. (중략)
간도성 연길현 명월진(明月鎭)에 설치되어 있던 간도특설대는 조래의 국경감시대를 모체로 하여 1938년 12월에 창설되었다. 당초에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박격포를 장비한 기박 1개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나중에 보병 2개 중대로 증강되어 대대 규모가 되었다. 부대장과 간부의 일부가 日系 軍官이고 나머지 전부는 한국계 군관이었는데, (중략) 간도성 일대는 게릴라의 활동이 왕성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계속하여 치안작전을 수행하느라 바빴는데 간도특설대의 본래의 임무는 잠입, 파괴공작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특수부대, 스페셜 포스로서 폭파, 소부대 행동, 잠입 등의 훈련이 자주 행해졌다. 만주국군 중에서 총검대회, 검도, 사격 대회가 열리면 간도특설대는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중략)
내가 간도특설대에 착임하였던 1943년 초두에는 게릴라의 활동은 거의 봉쇄되어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대단했다고 한다. 관동군 독립수비대와 만주국군은 1939년 10월부터 41년 봄까지 여기 동부만주에서 대규모의 게릴라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최전성기의 관동군의 위신을 걸고 철저하게 시행된 작전이었다. 그중에서도 항상 대서특필할만한 전과를 올렸던 것은 간도특설대였다. (후략)"
이들 문헌에서 백선엽 본인은 간도특설대 경력을 인정하고 부끄럽다는 정도의 언급은 하고 있으나, 이를 적극적으로 사죄한 적은 없다. 위에서 나타나듯 자신은 이미 동북항일연군 세력이 거의 소멸된 뒤에 간도특설대에 합류하였고, 결과적으로 상대한 적들도 후방 치안을 어지럽히던 팔로군 유격대 등 중국 공산당계 빨치산들이었기 때문에 크게 죄스럽지는 않다는 입장이다.
이 부분의 태도가 문제이기는 하나, 특별히 자신의 간도특설대 경력을 세탁하기 위해 없는 사실을 지어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실 백선엽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솔직히 밝히지 않은 것은 5.16 군사정변을 전후한 시점에서의 군내 알력에서의 그의 역할인데, 이 부분은 이례적으로 유난히 자기미화가 심한 편이다.
이후 만주군중위을 지내다가 해방 직후 평양으로 돌아왔고, 동향 사람이기도 한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일하다가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된 후 1945년12월에 월남했다. 당시 조만식에게 함께 내려가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월남 직후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국방경비대에 입대,1946년 2월 부산 제5연대 A중대장을 맡았다. 국방경비대가 정식 한국군이 된 이후에는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복무하였으며, 이때 벌어진 여순사건 당시 공산 게릴라 소탕과 주동자 색출 및 처벌의 재판장이었다. 1950년4월에 대령 계급으로 제1사단장이 되어 개성 지역을 담당하면서 6월 당시에는 경기도 시흥에서 고급 간부훈련을 받는 중이었다.
전쟁영웅이라 불리는 이유
이후 미군 제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대장의 지원 하에 1952년에 새로 창설된 제2군단 군단장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발췌 개헌 당시 계엄령을 거부한 이종찬을 대신해 1952년 7월에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1953년 1월 31일에는 그 동안의 전공으로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불과 33세였다. 이후 한국군의 규모 확대와 급여, 복지문제 개선과 지원을 확대하는 데 애쓰는 가운데 종전을 맡게 되었다.
6.25 전쟁 기간 동안 백선엽은 상기한 수많은 활약과 더불어 전쟁 중 부대 궤멸이나 대패, 총퇴각 같은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고, 빨치산 토벌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등 큰 전공을 쌓으며 미군 장교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 덕분에 미군의 한국군에 대한 평가를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를 통해 미군은 한국군을 냉전 구도에서 공산 블럭의 남하를 저지하는 유용한 동맹군으로서 인정하게 된다.
이 사실이 상당히 중요한 것은 6.25 전쟁 초~중반까지만 해도 미군은 한국군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미군은 한국군을 정규군이라기 보다는 조잡한 민병대 정도로 폄하했고, 장비를 주면 잃어버려서 적이 오히려 노획한 장비로 중무장을 할거라며 한국군에 대한 지원에 인색한 장군들도 많았다. 전쟁 후반으로 가며 많은 희생 끝에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게 되고, 한국군은 제한적이나마 자립의 기반을 닦게 된 것이다.
출처 : 나무위키(백선엽)
백선엽을 평가하는 것은 한국인 각자의 몫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그는 독립군을 죽인 친일파가 맞고, 또한 6.25전쟁의 전쟁영웅이 맞습니다. 저는 그를 좋지 않게 생각은 하지만 그가 한국전쟁 시에 좋은 활약을 하였다는 것은 무시할 수 가 없는 것이죠.
그는 그냥 일반사람에 불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당시에 상황에 적응을 한 것이죠.
당장에 내가 죽을 수 있는데 나라를 생각할 필요가 있나요? 최근 한국 국회의원들이 중국이나 일본과 짝짝꿍하는 모습과 연계가 되네요.
위안부 : 일본군의 성욕 해결, 성병 예방 등을 위해 일본 정부가 일본군 점령지나 주둔지 등의 위안소에 배치하는 여성을 뜻합니다.
정신대 : 근로정신대라고 불리며, 일본과 국내의 군수 공장 등에 강제 취역했던 조선의 여성들로 노동력을 착취당했습니다.
정대협(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협의회) : 정대협은 1990년 11월에 정신대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단체로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정의연(정의 기억 연대) : 2015년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 기억 재단이 정대협과 2018년 7월에 통합해 다시 탄생된 시민단체입니다.
근로정신대는 노동력의 동원이라는 점에서 성적 착취가 이뤄진 일본 군 위안부와는 다르지만, 사실 글로정신대라고 모집해 놓고 위안부로 끌려가거나 성착취를 당하는 경우도 잤았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위안부와 근로정신대 용어가 혼용돼 사용되었고,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위안부 문제를 증언하기 전까지 근로정신대라는 용어가 위안부보다 더 일반적으로 상용되었습니다.
불거지는 의혹
1. 정의연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만을 지원하는 단체????
- 정의연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돕기 위해 설립된 단체이지만 그분들을 위한 지원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정의연내의 정관 제4조에 명시되어있음. 일본군 성노예제 관련 모든 사람에 대한 지원을 명시됨.
2. 윤미향 당선인과 정의연은 기부금을 유용하며, 엉뚱한 곳에 돈을 썼다????
- 윤 당선인과 정의 기억연대는 회계관리를 허술하게 했으며, 지출 내용을 정확하게 기재하지 않았음이 드러난 상태임. 이와 관련해서 정의연 사무총장은 자신들이 아는 회계사분이 그런 식으로 처리해도 괜찮다고 하여 임의적인 숫자를 넣었다고 해명함.
- 정의연 기부금을 가지고 한 맥주 체인점에서 많은 돈을 쓴 부분도 논란임. 사용처 세부내역을 공개하라는 요구에도 선을 긋고 있습니다. 정의연은 불투명한 모습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상황임. 기부금이 윤 당선인의 개인 용도로 부적절하게 쓰였거나 단체의 설립 목적에 맞지 않게 사용되었다면 이에 대한 처벌을 받으면 됩니다. 이 문제는 명확한 사실관계 파악이 우선임.
3. 윤미향 당선인은 반미를 외쳤는데 미국으로 딸을 유학 보냈고, 그 유학자금은 어떻게 마련했는가?
- 딸의 유학자금에 대해서는 '남매간첩단'사건에 휘말렸던 남편이 받은 형사보상금 등으로 유학비를 마련한 것이라고 해명함.
4.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내용을 정의연을 알고 있었다??
- 박근혜 정부와 정의연은 극과 극이었음. 정의연과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지속적으로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했지만 박근혜 정부는 이 요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합의를 해 버렸음. 서로 사이가 좋지도 않았는데 이 합의 내용을 정의연이 이미 알고 있었다?
5. 윤미향 당선인의 개인계좌 사용
- 열악한 시민단체와 관행이라는 측면에서는 과거 용인되었던 부분이지만,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윤미향 당선인은 관련 내용에 대해 인정함. 단 실제 집행액에 차이가 나지 않은 것으로 전달 진행함.
6. 평화와 치유가 만나는 집 안성 쉼터 의혹
가. 고가매입
- 10억 원에 2012년 현대 중공업으로부터 지정 기부를 받고, 접근성이 좋은 서울 마포구 성산동을 고려했으나 땅값이 너무 비싸서 안성으로 결정 그런데 여기서 비판은 접근성이 나쁜 곳을 택해 할머니들을 위한 장소가 아닌 정의연이나 윤미향 당선인을 위한 장소로 쓴 것이 아니냐는 부분이고, 실제로 할머니들을 위해서 쓰이지 못함.
나. 아버지를 관리인 지정
- 6년간 받은 총 관리금액이 7,580만원을 윤미향 당선인 아버지에게 돌아갔습니다. 사적 이윤 추구를 위해 아버지를 관리인으로 지정한 것은 아니며 사택관리 경험이 있어서 관리 요청을 하였다고 해명함.
다. 남편 지인의 소개
- 이규민 당선인은 안성신문 대표이며 소개에 따라 주택을 매입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시세보다 더 높은 가격을 책정하여 이익을 주지 않았다면 문제가 되지 않음.